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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수많은 정보와 사람들을 마주하며 ‘무엇을, 누구를 믿어야 할까?’라는 질문에 직면합니다. 스마트폰 속의 낯선 이, 온라인 댓글,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신뢰 가능성을 평가합니다. 특히 인공지능(AI) 기술이 발전하고 가짜 정보가 넘쳐나는 현대 사회에서 신뢰의 문제는 더욱 복잡하고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AI 시대, 변화하는 신뢰의 본질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신뢰를 연구하는 레이첼 보츠만(Rachel Botsman) 교수는 신뢰를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자신감 있는 관계’라고 정의합니다. 이는 단순히 위험을 평가하는 합리적인 과정을 넘어, 불확실성을 극복하고 낯선 이에게 마음을 열며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인간 본연의 능력과 연결됩니다.
우리가 믿는 대상의 변화: ‘누구’에서 ‘무엇’으로
보츠만 교수는 우리가 ‘신뢰하는 정도’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신뢰하는 방식’이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과거에는 주로 사람(who)을 신뢰했다면, 이제는 무엇(what)을 신뢰하는지 구별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실제 인간인지, 알고리즘인지, 생성된 콘텐츠인지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무엇’ 뒤에는 누가 있는지까지 파악해야 하죠.
예를 들어, 자율 주행차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단순히 차가 움직일 것이라는 기능을 넘어, 고위험 상황에서 차의 판단 능력을 신뢰해야 합니다. 기술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면서 특정 영역에서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대체하기도 합니다.
인공지능과 공감: 신뢰의 새로운 차원
보츠만 교수는 AI가 공감의 두 가지 차원(인지적 공감)을 수행할 수 있다고 언급합니다. 사용자의 감정을 파악하고 적절하게 반응하는 것이죠. 하지만 AI는 인간처럼 ‘느낄’ 수는 없습니다. 보츠만 교수는 바로 이 AI의 ‘한계’가 오히려 강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의료, 교육, 정신 건강 지원 분야에서 AI는 정보 파악과 반응을 담당하여 인간 전문가의 부담을 줄여주고, 인간은 지지와 보살핌 등 관계적인 측면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AI에게 무엇을 신뢰해야 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정보 과부하 시대의 개인의 부담
현대 사회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기관이나 전문가의 명확한 답변을 얻기 어려운 상황(예: 산불 연기의 안전 여부, 팬데믹 초기 정보)에서 우리는 스스로 전문가가 되어 정보를 필터링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보츠만 교수는 과거에는 신뢰가 위에서 아래로 흘렀지만 (기관, 전문가 등), 이제는 옆으로 흐른다 (친구, 가족, 소셜 미디어)고 설명합니다. 파편화된 정보 속에서 개인이 진실을 판단하는 필터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이는 엄청난 인지적 부담을 야기합니다.
더 큰 문제는 개인이 정보를 필터링할 때 자신의 동기나 믿고 싶은 것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보츠만 교수는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보다 ‘왜 그것을 믿고 싶은지’를 질문하고, 반대되는 정보를 찾아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합니다. 특히 젊은 세대는 이러한 정보 필터링의 부담과 불확실성으로 인해 심리적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인간 관계 속 신뢰와 취약성
신뢰는 상호적인 과정입니다. 누군가 신뢰를 ‘주고’, 누군가 이를 ‘받을 때’, 그 관계는 순환하며 인간 관계의 기반이 됩니다. 이는 단순히 무언가를 얻기 위해 신뢰를 쌓으려는 시도와는 다릅니다. 인간 관계에서 행복과 웰빙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인간적인 연결이며, 이는 서로 신뢰를 주고받는 순간들, 즉 ‘상호성’을 통해 형성됩니다.
신뢰 신호와 디지털 시대의 단절
우리는 대면 상호작용에서 미묘한 ‘신뢰 신호'(trust signals)를 포착합니다. 상대방의 태도, 표정, 주변 환경 등 다양한 단서들을 통해 신뢰 여부를 판단하죠. 하지만 전화 통화나 소셜 미디어 소통처럼 디지털화된 환경에서는 이러한 신뢰 신호가 줄어들어 상대방의 의도나 신뢰 가능성을 판단하기 더 어려워집니다.
취약성과 신뢰의 관계
신뢰는 종종 ‘취약성’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자신의 어려움이나 솔직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을 수반하지만, 이를 통해 진정한 연대감과 신뢰가 형성되기도 합니다. 브레네 브라운(Brené Brown)의 연구처럼, 취약성은 정서적 노출이며, 신뢰는 위험 없이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작은 위험을 감수하고 진솔함을 나눌 때 신뢰는 깊어집니다. 보츠만 교수는 우리가 충분히 타인과 교류하지 않으면 이러한 미묘한 신뢰 구축의 기술을 잃을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다양한 맥락 속 신뢰
신뢰는 개인적인 관계뿐 아니라 사회 시스템에서도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호텔에서 에어비앤비로의 변화는 기관에 대한 신뢰에서 개인 간의 신뢰로의 이동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에어비앤비 같은 플랫폼에서는 여전히 시스템(예: 설명의 정확성, 보험)에 대한 신뢰가 필요합니다. 이는 관계적 신뢰에서 거래적 신뢰로 성격이 바뀌는 것을 의미하며, 상업화가 규모 확장을 가능하게 하지만 관계의 역학을 변화시킵니다.
또한, 개인의 정체성이나 사회적 위치에 따라 신뢰와 위험의 관계는 달라집니다.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된 사람은 더 높은 수준의 신뢰를 필요로 합니다. 직장 내에서도 직급, 성별 등에 따라 발언하거나 위험을 감수하는 데 필요한 신뢰의 수준이 다릅니다. 자신이 신뢰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주저하는 부분은 없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뢰가 주는 ‘허락(Permission)’
신뢰가 높아지면 우리는 더 많은 ‘허락’을 얻게 됩니다. 자신의 가치관에 맞지 않는 것을 거절하거나, 더 솔직하고 온전한 자신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됩니다. 신뢰는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너무 믿는 것’과 명확한 기대치
‘너무 잘 믿어서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종종 너무 빨리, 충분한 정보 없이 신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스트레스나 압박 상황에서 직관에만 의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연인 관계에서는 상대방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는데 너무 많은 것을 내주거나 취약한 모습을 보일 때 배신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상대방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소통이 부족할 때 발생합니다.
조직과 개인의 신뢰 구축
조직이 신뢰받기 위해서는 ‘일관성’이 중요합니다. 고객 경험의 모든 접점에서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신뢰를 쌓는 데 핵심입니다.
조직 내에서 낮은 직급에 있는 개인이라도 신뢰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이는 상사를 신뢰하고(trusting up), 동료를 신뢰하며(trusting sideways), 그리고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위험 감수를 보여주고, 동료에게 권한을 위임하며, 마이크로매니징을 하지 않는 모습은 결국 신뢰로 되돌아옵니다.
AI와 기술 발전으로 신뢰의 지형이 복잡해지고 개인의 부담은 커졌지만, 인간 관계에서 신뢰의 중요성은 변함없습니다. 우리는 변화를 이해하고, 신뢰의 대상을 현명하게 판단하며, 상호적인 관계 속에서 신뢰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신뢰는 우리를 연결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사회적 접착제 역할을 합니다.
이 글은 ‘How to be a Better Human’ 팟캐스트의 레이첼 보츠만 교수 인터뷰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신뢰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얻고 싶다면 레이첼 보츠만 교수의 저서나 오디오북을 들어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